미국 동부 여행 가는 길
2010. 2. 15
목적지를 미국으로 정한 이유는 간단했다. 미국에 가보고 싶었다. 세계 최강대국이라는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많이 알고 싶었다. 여행지를 서부보다는 동부로 정한 이유도, 서부보다는 동부에 중심 도시들이 많고, 또 미국 역사와 관련된 유적이 많기 때문이었다.
여행 일정을 2월 말로 정한 것은 여러 이유에서였다. 기숙사에서의 일정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학교 기숙사는 매학기 개강 초 1주일가량을 시설 정리 및 대청소 관계로 일률적으로 전원 방을 비워야 했다. 그 기간에 집에 내려가 있기도, 그렇다고 서울에서 친척집에 머물기도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그 기간에 여행을 가고 싶었다. 그래서 수강신청 일정을 확인한 뒤부터 설 연휴가 끝난 2월 16일 즈음을 여행 기간으로 생각해 두고 있었다. 문제는 개강에 너무 붙어있다는 점이었다. 원하는 목적지들을 충분히 둘러보려면 2주 정도는 확보해야 했는데, 그럴 경우 설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개강 하루 전날에야 귀국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방학 시작 바로 직후 여행을 시작하는 경우, 여행 준비를 학기중에 짬을 내서 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었다. 또한 방학 중간의 경우 방학의 리듬이 깨질 뿐만 아니라 한겨울인지라 너무 추웠다. 그리고 앞서 말한 기숙사 요인도 부담이었다. 그래서 결국 여행 일정은 설 연휴 마지막날인 15일에 시작해 3월 1일에 귀국하는 걸로 여행 일정을 확정했다.
여행 준비는 생각보다 순조로웠다. 해외여행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 때(2006년 에딘버러와 런던)는 각각 1박 2일의 초단기였고, 2주일 가량의 장기 여행은 처음이었다. 처음에는 준비해야 될 것이 너무 많고 준비의 윤곽이 잡히질 않았다. 그렇지만 차근차근 준비를 해 나가니 어느새 여행준비는 다 끝나 있었다. 비행기표, 도시간 이동수단, 숙소, 대략적으로 가볼 곳들, 그리고 새로 산 배낭까지.
이번 여행 준비에서 가장 어긋난 것은 설 기차표 예매였다. 비행기표를 이미 2월 15일~3월 1일로 예약해둔 상태에서 나는 적절한 시간대의 상행 기차표를 예매하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비행기 출발 시각은 15일 밤 8시. 버스 첫차가 아침 6시이므로 이걸 탈까 고민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혹시 모르니 미리 서울에 올라가는 것을 권했다. 그래서 중간 방안으로 나온 것이 14일 자정에 출발하는 심야우등버스였다.
14일 자정, 미리 서울서 챙겨온 배낭을 메고 서울행 버스에 올라타면서 여정이 시작되었다. 적당히 시간이 걸려주었으면 하는 나의 바람과 달리, 버스는 칼같이 새벽 4시에 센트럴시티에 도착했다. 난감했다. 고민하다가 찜질방이 보이길래 일단 찜질방으로 들어갔다. 씻고 잠을 청했는데 네시간만에 다시 깼다. 오전 9시. 여전히 비행기 출발까지 시간은 많이 남았다. 하지만 찜질방에서 더 버틸 여력도 없었고, 공항가면 뭔가 할 게 있겠지 하는 기대감에 공항에 가기로 했다.
9호선 급행과 공항철도는 생각보다 빠른 한시간만에 고속터미널에서 인천공항으로 나를 배달해줬다. 공항에서도 시간 때우기는 만만치 않았다. 인천공항을 끝에서 끝까지 한 두어번은 왕복해본 것 같다. 세시쯤 수속을 밟고 출국장에 들어섰다. 출국장에서도 시간때우기가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면세점은 생각보다 파는 물건이 일률적이었다. 화장품, 술, 담배. 그리고 면세점을 비롯해 상점들 규모가 큰 것이 아니어서, 금방금방 구경이 끝났다. 출국장에서도 끝에서 끝까지 두어 번은 왕복해본 것 같았다. 인천공항의 원래 터미널 건너편의 새로 생긴 탑승동 쪽에도 가보려고 했는데, 건너가서 나올 수 없다는 직원의 말에 포기했다.
그렇게 열시간 가량을 공항에서 버틴 끝에, 드디어 기다리던 뉴욕행 비행기에 올라탈 수 있었다. 일부러 부탁해서 앉은 비상구열 자리는 꽤 좋았다. 다리를 쭉 뻗을 수 있었고, 좌석 앞쪽의 LCD모니터의 각도도 내맘대로 조절할 수 있었다. 화장실도 가까웠다. 다만 비상구열에 앉자마자 승무원이 다가와서 "이 좌석은 비상구 열 좌석이니 이 팜플렛을 미리 읽어보시고 비상시 승무원의 지시에 따라주시기 바랍니다."라고 일러 주었다.
열네시간의 긴 비행을 거쳐, 오후 여덟시 반쯤 비행기는 뉴욕에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조금 내려 걸어가자 미국 입국의 첫 관문, 입국심사대가 나왔다. 사실 불안했다. 배낭에다 여행 관련 인쇄물을 다 넣고 부쳐버린 바람에 기내에서 입국 카드를 기록할 때 주소란을 적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입국심사 후 짐을 찾게 되어 있었다. 일단은 부딪혀 보았다. 쓸데없는 짓이었다. 입국심사대 직원은 냉정하게 "무비자 입국자용 녹색카드로 제출할 것", "주소란을 채울 것"을 요구했다. 내가 사정을 말하자 "항공사 직원에게 도움을 받아라."라고 냉정하게 대꾸했다. 어쩔 수 없이 발길을 돌렸다. 다행히 두리번거리는 나를 한 직원이 발견했다. 그 직원분의 도움으로 나는 녹색카드를 다시 기록하고 입국심사관과 마주했다. 목적에 대해 묻는 질문만 솔직히 "여행"이라 대답하고, 이후 누구 주소냐는 질문에 친구라고, 몇년지기냐기에 고등학교때부터 친구라고 거짓말을 했다. 실은 그 주소는 아까 직원분이 자기 주소인데 친구라고 거짓말하라며 적어준 것이었다.
거짓말은 먹혔다. 다시 절차에 따라 모든 손가락의 지문을 찍고, 맨얼굴(=모자와 안경을 벗고)로 사진을 찍었다. 드디어 여권에 입국 스탬프가 찍혔다. 짐을 찾았다.
뉴욕에서의 숙소인 민박 아주머니와 통화를 했다. 이 시간에 지하철을 타는 게 그리 위험하지는 않지만, 꽤 걸릴거라고 했다. 결국 택시를 타기로 했다. 지하철을 어디서 타는 지 쉽게 보이지도 않았고, 게다가 매우 피곤했다. 버스를 탔던 14일 자정부터 제대로 된 잠을 자지 못해 매우 피곤한 상태였다. 공항을 빠져나오니 바로 택시승강장이 보였다. 그쪽으로 걸어가는데 누군가 다가왔다. 공항에서 불법택시 호객행위가 많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던 터라 무시하며 걸었는데, 또 다른 사람이 다가와 어디로 가냐고 물었다. "맨해튼"이라고 대답했더니, 가까이에 있는 택시들은 퀸즈나 브루클린으로 가는 택시고, 맨해튼 가는 택시는 저 쪽에 있다고 하며 'Official Taxi 어쩌고 저쩌고'가 적힌 티켓을 쥐어줬다. 깜빡 속을 뻔했다. 걸어가다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나는 그들의 집요한 호객행위를 물리치고 옐로우캡들이 줄지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정말 집요했다. 뒷걸음질 칠때마다 저기 옐로우캡들은 맨해튼 가지 않는다고 내게 말했다. 내가 무시하며 돌아서자 거의 다그치듯 나에게 말하며 심지어 내게 영어를 할 줄 아느냐-_-라고까지 물었다. 그러다 드디어 적당히 둘러댈 말이 생각나 $45가 너무 비싸서 다른 교통수단을 찾는다고 말하니 $35에 태워주겠다고 말했지만 한귀로 흘렸다.) $60라는 거금이 들긴 했지만, 한 시간만에 민박집에 도착했다. 민박 아주머니에게 민박 설명과 뉴욕 여행 설명을 들었다. 씻고 잠을 청했다.
P.S. 다음은 내릴 때 택시기사와 내가 나눈 대화였다.
"얼마에요?"
"50.07달러입니다."
"혹시 거스름돈 줄 수 있어요? 100달러 지폐밖에 없어서."
"좋아요. 얼마나 거슬러주길 원해요?" (뉴욕 택시는 요금에 팁까지 지불해야 된다.)
(잠시 망설이다가.......)"45달러면 적당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미 택시기사는 20달러짜리 두 장을 손에 쥐고 흔들고 있었다.